나의 어린 시절은 시골에서 보냈다. 그림을 그리는 나로서 시간이 갈수록 더욱 선명해 지는 것은 내 속에 있는 또 다른 나를 표현하는 원천은 성장한 후의 내가 아니라 어린 시절의 사건과 많은 추억이 빚어 낸 부산물들이 새로운 나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초등학교 5학년인 나는 그 해 12살이었다. 13살로 넘어가기가 몹시도 싫었던 나는 무척이나 괴로웠던 생각이 난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거의 뜬 눈으로 아침을 맞으며, 시골의 들판으로 발길을 옮겼다. 들판은 황금들판으로 고개 숙인 벼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못해 환상적이었다. 벼 사이를 헤쳐 가며 나는 온갖 괴로움을 삭히며, 산다는 것에 대하여 물음을 갖기 시작했다. 그 물음이 극에 달했을 때는 내 뼈들이 용해되어 흘러내리는 고통을 경험했다. 하루 종일 들판과 한 몸이 된 나는 어둠이 시작된 지도 모를 정도였다. 몇 차례 죽음의 문턱을 경험한 나로서는 삶의 가치에 대하여 뼈가 시리도록 생각해 보았고, 그럴수록 마음속에 자리한 커다란 욕심을 비워 마음의 여백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성장하여 후천적 지식과 지혜로 자신을 포장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나는 어렸을 때의 사건들이 나를 빚어내고 있는 듯하다. 성장하며 쌓이는 것은 비우기보다는 채움으로써 만족 해 하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 가는 반복적 버거운 탑을 쌓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나 역시 이 굴레에서 벗어나려 애를 쓴다. 한국화를 전공한 나는 여백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도교사상으로 볼 땐 여백을 무(無)로 보며, 유교는 소(素), 불교는 여백을 공(空)으로 본다. 이 셋은 결국 하나로서 동일한 것이다. 여백(餘白,margin)의 뜻은 이문, 가장자리, 여유, 차이 등으로 해석한다. 우리 청주에도 드디어 미술 창작스튜디오가 마련되었다. 입주 작가들도 결정되었고, 운영관리팀도 결정되었다. 국내의 미술 창작스튜디오는 강원권, 영남권, 호남권, 경기권, 충남북권 등을 포함해 20곳이 넘는다. 이들의 설립취지는 대부분 미술작가가 창작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안정된 작업공간과 편리한 작업여건을 제공하며, 교류전 및 창작의 계기를 모색하고 일반 대중과 현대미술이 함께할 수 있는 미술문화 공간을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뜻대로 잘 되지는 못한다. 시의 요구에 비하여 스튜디오가 비활성화 될 수도 있고, 관리운영자와 작가들 그리고 시 관계자들의 산재된 차이differ가 있을 수 있다.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여러 가지 다름에 대한 것을 우선 인정해야 하며, 과정을 배제한 결과 위주의 실적만을 평가하지 말고 서로가 화합할 수 있는 마음의 여백margin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작가는 자신을 빗어내는 부산물의 출처에 대하여 물음이 있어야 하며,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이치의 인식과 자신에 내재한 차이margin를 새롭게 탐색해야 할 것이다. 
  차이margin를 갈망해 보자. 나는 여백을 사랑한다. 여백margin은 바늘 찌를 곳도 없는 텅빈 충만, 채워진 빈자리, 가벼운 중량감, 숨 쉬는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