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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컨셉 ]   작품컨셉 KHS 2012-8-01
[ 작품컨셉 ]   평론모음 KHS 2012-8-01
 


평론모음


여백 탐구를 위한 기나긴 여정


황선형(모리스갤러리, 아트허브 대표)

  중세 사람들에게는 ‘공백공포증후군(空白恐怖症候群 horror vacui)’이 작용하고 있었다. 만물을 창조한 신(神)이 개입하지 못하고 비어있는 여백(餘白)이나 공백에서 커다란 공포를 느꼈다. 그래서인지 중세의 그림에서는 일체의 공백이 보이질 않고 온갖 사물들로 화면이 꽉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세 이후의 서양미술을 보면 그 전통적 관습은 꽤 오랫동안 많은 화가에게 이어졌고 작품에 반영되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같은 화가도 여백공포에 시달린 작가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동양화의 비어있는 여백과는 상당히 대치되는 개념이다. 수묵 위주로 작품을 완성하는 동양화에서의 여백은 대상의 형체보다는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을 표현하기 위한 방편이었으며, 감상자의 시정(詩情)과 여운(餘韻)을 담아내거나 비움과 채움을 동시에 표현하는 훌륭한 표현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여백을 두어 비움으로써 공간은 더욱 확장되고, 채움으로써 비워지는 공간은 역설적이기까지 하다. 같은 시각예술 분야지만 동ㆍ서양의 여백에 대한 의미와 해석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양화를 전공하고 수묵 작업으로 작품을 시작한 후, 컬러풀한 배경으로 여백을 처리한 최근 작품에 이르기까지 강호생은 오랜 시간 여백의 의미와 재료의 특수성에 관해 탐구해 오고 있다. 붓, 먹, 물, 벼루가 가진 속성과 물의 양, 필선의 속도, 힘과 유연성, 물질 간의 시차 같은 감각적 행위들이 만나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에 관한 탐구는 강호생 작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탐구는 강호생이 추구하고자 하는 예술적 지향점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자신의 작업 개념을 도식화해 표현한 그림을 보면 그의 작업 개념이 얼마나 논리적으로 체계화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도식화는 언뜻 보아서는 심오한 사상이나 종교의 개념도와도 같아 보이는데, 결국은 재료와 여백을 통해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예술적 지향점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그린 도식화임을 알 수 있다.
  원색과 먹물, 여백이라는 삼요소로 도식화된 그림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원색은 경험적 현실의 역동성을 의미하고, 이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에 비유된다. ② 먹물은 중간매체로써 원색의 역동성을 중화시켜 희생함으로써 생명을 탄생시키다. ③ 여백은 블랙홀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를 제공하고, 정신적 유희의 즐거움을 맛보게 한다. ④ 결국, 세가지 요소를 융합시켜 ‘여백의 에너지’를 새로운 ‘생명’으로 통합(統合 Synthesis)시킴으로써 강호생의 예술적 모형이 완성된다.

  The Margins of Life 20150624
  43x77cm
  Acrylic on the Fabric
  2015

 
  이번 모리스갤러리 초대전에 출품되는 강호생의 신작은 그동안 꾸준히 탐구해온 여백과 재료에 대한 결과물 중 최고의 결정판(決定版)이라 할 수 있다. 융(絨) 위에 원색의 노란색과 파란색 물감으로 환희로 충만 된듯한 느낌의 역설적인 여백을 만들어 낸 후, 그 위에 먹물을 얹어 시간과 기울기의 조절에 의한 물기둥을 표현한다. 때로는 물기둥 주변에 극사실적으로 아주 작은 무당벌레나 나뭇잎 같은 소재를 곁들이고 있다. 원색을 사용한 배경 때문인지 작품은 화려하게 느껴지면서도 단아하고 정갈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는 마치 미니멀 아트(Minimal Art) 계열의 작품과도 같은 단순 명료함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강호생의 미니멀이 보여주는 인상의 강도는 다른 어떤 작품 못지않게 강렬할 뿐만 아니라 생명을 잉태한 듯한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결국, 이번 작품은 작가가 이미 자신의 예술적 지향점으로 정의한 원색과 먹물, 여백이라는 삼요소의 융합으로 생명력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노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내가 유희하는 부분은 여백! 그 '텅 빈 자리'이다. 여백! 그것은 ‘텅 빈 충만’이다. 그것은 채워진 빈자리이다. 그것은 가벼운 중량감이다. 그것은 숨 쉬는 공간이다. 비움으로 채울 수 있기에 나는 그 여백을 사랑한다.” 글 말미의 “비움으로 채울 수 있기에 나는 그 여백을 사랑한다.”는 작가의 표현이 긴 여운을 남기고 깊이 울린다. 마치 과학자와도 같은 진지한 태도로 재료적 특성에 관한 체계적 연구와 여백 탐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강호생의 작업 여정이 한층 깊어지기를 기대해본다.
 


시간의 축적으로 체현되는 자연과 수묵의 표정


김상철(미술평론)

  주지하듯이 수묵은 대단히 오랜 역사를 지닌 조형방식이다. 이러한 역사성은 바로 동양회화 전통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오랜 기간에 걸쳐 발전하여 성숙된 수묵은 대단히 풍부한 조형경험들을 축적하며 그 자체가 형식이자 내용을 이루는 독특한 조형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수묵의 전통성과 풍부한 조형경험은 서로 다른 해석과 이해를 유발하게 마련이다. 그 중 하나는 수묵은 전통시대의 심미관을 대변하는 것으로 이미 완성된 형식이라는 인식이다. 이에 반하여 수묵 은 대단히 풍부한 조형적 경험을 축적하고 있는 것이기에

  light and History of Time 2011015
  fabric+indian ink
  142×71×3cm
  2010

  그만큼 재해석과 재발견의 여지가 많은 전통의 보고라는 이해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가지의 해석은 옳고 그름의 판단의 대상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현대라는 시공에서 전통과 현대라는 미묘한 접점을 여하히 인식하고 이해할 것인가에 따른 해석에 따른 선택 일 뿐이다.
  작가 강호생의 작업은 전적으로 수묵을 지지체로 하고 있다. 화면 가득히 넘쳐나는 수묵의 기운은 그의 지향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고, 또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언뜻 부분적으로 형상이 드러나는 듯 하지만 그에 앞서 화면에서 발현되는 것은 수묵이라는 극히 전통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재료의 강한 물성의 표출이다. 그것은 형상, 혹은 조형이나 표현과 같은 관념적인 해설을 넘어서는 것으로 수묵을 통해 목적하고 추구하는 바에 육박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업은 세세하고 부분적인 곳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수묵 자체의 물성과, 그것이 이루어내는 표현을 여하히 조형으로 수렴하여 안착시킬 것인가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의지를 견인하고 구체화하는 것은 바로 물의 속성이다. 그의 작업에서 물은 단순한 수묵의 매개라는 소극적인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며 내용이고 실질인 셈이다.
  작가의 화면은 물에 대한 민감하고 섬세한 관찰과 반응으로 점철되어 있다. 스미고 번지는 물의 속성이 시간의 변화에 따라 표현해내는 물리적 변화를 포착하여 그 표정을 화면에 담아내는 그의 작업은 결국 시간을 축적하는 것이다. 시간은 물이라는 물성을 통해 대단히 풍부하고 우연적이며 비정형적인 흔적들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무작위의 성질을 지니고 있지만 작가는 섬세한 관찰과 시간의 경영을 통해 그것을 자신의 조형으로 수렴해 낸다. 이는 단순히 조형적 기능이 아니라 전적으로 작가의 안목과 선택에 의해 포착되는 순간적인 것이다. 이는 물, 혹은 수묵이라는 재료가 지닌 독특한 물성과 시간이라는 자연, 그리고 작가라는 인간이 어우러져 이루어지는 독특한 조형방식이다.
  작가의 의지를 반영하는 작위와 수묵의 물성과 시간이라는 무작위가 어우러지는 이러한 조형 방식은 분명 전통적인 수묵의 표현이나 심미관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작가가 다분히 전통적인수묵이라는 재료를 통해 자신의 개성을 발현하고 자신이 속한 현대라는 시공을 반영하고자 한다는 작업의 핵심일 것이다. 작가의 화면은 모호하고 몽롱하다. 그것은 마치 혼돈과 무질서의 세계와도 같은 물의 흔적들로 이루어진 무작위의 집적이다. 특정한 사물을 묘사하거나 표현하지 않고, 물의 흔적을 따라 맺혀지는 물방울을 통해 무작위의 혼돈에 질서를 구축해 나가는 그의 화면은 물리적인 화면의 크기에서 벗어나 스스로 증폭되며 확장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물방울의 섬세한 묘사는 무작위의 방만함을 작위의 질서로 수렴하는 최소한의 수단인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물방울의 형상 역시 몽롱한 이중적 구조로 표현되어 여전히 유동하며 변화를 이뤄내고 있다. 극히 섬세하지만 이중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는 그의 화면은 이러한 몽롱함과 시각적 착시를 통해 물이라는 물질을 빌어 축적한 시간이라는 자연을 조형으로 수렴해 내고 있는 것이다. 수묵과 같이 전통성이 강한 재료의 운용에 있어 늘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계승과 발전의 문제이다. 이는 어쩌면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경우 전통적인 가치와 원칙들을 준수하기 보다는 주관적 해석과 개성의 표출을 통해 수묵의 새로운 표정을 모색해 보고자 함이 여실하다. 한지나 화선지 같은 전통적인 재료는 일필에 의한 일회적 표현을 전제로 한 것이다. 작가의 경우와 같이 시간의 차이를 두고 변화하는 수묵의 물성을 수렴해 냄에 있어서는 반드시 적합한 수단이라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에 작가는 두텁고 고른 결을 지닌 천을 선택하고, 필선에 의한 조형이라는 원칙에서 벗어나 분방한 발묵으로 수묵의 심미를 표출해내고 있다. 이러한 천의 특성은 화면 가득 습윤한 물의 향연을 연출해 내며 한없이 유동하는 물성의 독특한 맛을 배가시키고 있는 것이다. 작가가 수묵, 특히 물의 작용에 관심을 두는 것은 분명 물질적인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니고 있는 함의는 단순히 수묵, 특히 물(水)이라는 물질 자체에 머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을 통해 이루어지는 무수한 변화와 무작위의 현상들은 단순한 물질의 특성이라는 제한적 의미로 해석하기 보다는 자연의 또 다른 모습으로 이해함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작가는 어쩌면 자연이라는 무작위와 조형이라는 작위의 병열과 조화를 통해 자연과 인간이라는 대단히 오래되고 본질적인 관계에 대해 성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묵이 지니고 있는 전통성과 물성은 바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인 접근 방식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차용된 것이며, 이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통한 독특한 표현은 바로 자신이 속한 현대에 있어서의 인간과 자연에 관한 성찰의 보고서인 셈이다. 수묵은 필법(筆法)에서 비롯되어 묵법(墨法)으로 숙성되고, 수법(水法)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기 마련이라는 옛 화론의 이야기는 단순히 기법적인 과정의 나열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성찰의 의미를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새롭다는 것이 단순히 소재나 표현의 참신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과 사유의 내용을 강조하는 것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작가의 독특한 작업은 분명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작위라는 조형으로 상징되는 현대와 무작위적인 자연에 대한 성찰에 바탕을 둔 전통이라는 민감한 경계에서 한 걸음 더 내딛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호생의 수묵화


박영택(미술평론)

  사군자, 풍경그림과 함께 강호생은 폐차장 한 구석에 쌓여있는 수명이 다한 타이어를 그렸다. 사실 그것이 타이어를 그린 것인지는 명확히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빠르게 한 번에 그어 내린 붓질, 먹의 번짐, 여백이 자연스레, 우연적으로 만들어낸 자취가 타이어처럼 보일 뿐이다. 타이어를 보는 순간 먹과 얼룩, 자잘한 붓질들은 사라지다가 다시 붓의 흔적과 먹의 농담에 주목하다보면 이내 타이어라는 대상은 사라진다. 그 둘 사이는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놀이하듯 스러지다가 출몰하는 기이한 잔상들을 남긴다.  
   타이어가 쌓여있는 장면, 거리풍경의 일단은 특정 대상의 사실적인 접근, 일상의 풍경, 삶의 현장을 주목한 것이자 동시대 환경문제, 특히 생태계의 파괴 등과 관련된 다분히 시사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수묵의 효과와 함께 건져 올리기 위해 필요한 소재이기도 하다. 수명이 다해 버려진 타이어의 집적이 보여주는 흥미로운 형상의 사실적 재현이 아니라 그 구체적인 대상성을 뛰어넘는 운필의 대응이 우선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쉽게 말해 수묵의 효과와 필 맛을 극대화하기 위해 적합한 소재로 차용된 것이 타이어라는 얘기다. 


  Tire 205cm×90cm
  Mixed Korean drawing paper and India ink
  2004

  그러니까 ‘타이어’는 도시라는 공간의 속성과 속도의 극대화와 시간 단축의 용도로 사용되다가 빠르게 폐기되고 소모되어야 하는 물질의 상징, 그로 인해 초래되는 환경문제 등을 암시하는 동시에 수묵의 효과를 극대화하면서도 ‘수묵조형의 현대성’이라는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한 소재의 선택 아래 취택된 것이다. 일종의 알리바이로 작동한다. 작가에게 있어 타이어를 그린다는 것은 대상의 구조적인 힘의 파악을 대상의 본체로 보려는 동양화의 일반론적 지향과 연결되는데 이는 문인화를 연마하는 미적 감수성과 관계된다. 결국 타이어를 빌려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을 구성한 것이고 그렇게 직관적인 표현으로 순식간에 이루어진 수묵그림이 바로 이 타이어를 그린 그림이다.

   강호생은 오랜 시간 동안 수묵에서의 지, 필, 묵을 중심으로 표현한 선과 여백의 조형성 그 자체를 드러내는데 관심을 기울여왔다. 동양화가 급변하고 있으며 이제는 동양화나 서양화의 구분조차 의미 없어지는 현실에서 그는 여전히 동양화의 특성과 본질, 정체성에 관한 문제를 그림의 중심에 불러들이고 있다. 그는 늘상 자신의 작업의 특징은 바로 일획의 묵필에 담긴 동양사상의 일획론에 기반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니까 필선의 생동감을 더하기 위하여 여백을 최대한 살려 화면의 단순화를 꾀하고 있으며 반대 화면은 여백을 살리되 굵직하게 채워진 묵필과 가느다란 필선들로 채워 대조를 이루게 하는 그림의 방식이 그렇다. 그러니까 그는 동양화의 ‘본질’을 여전히 추구하는 작가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그렇게 이해된 것, 추구해야 하는 본질의 가시화다.  
   동양회화의 독특한 조형미는 화면에 나타난 형태보다는 표현 형태로써 형성된 여백을 더욱 중요시여기며, 생략적이고 함축적인 골법에 의한 필묵법의 예술로 형성되면서 발전하였는데 여기서 여백이란 필요한 부분의 본질만을 표현하면서도 무한한 배경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감상자로 하여금 그 여백을 상상 속에서 유희하게 하는 것, 그리고 여백은 텅 빈 충만이며 채워진 빈자리이자 숨쉬는 공간이자 동양화의 그 유희에 정신적인 미가 있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나는 나의 일 필 속에서 정신적 유희인이고 싶다. 마음을 비우고, 그 속에서 숨쉬고 싶다. 그 텅빈 자리에서 자유하고 싶다. 그 자유를 누려보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것을 알 수 없을 것이며, 아무도 그것을 함부로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작가노트,2000)
   근작 역시 종이 위에는 그저 붓이 지나간 자취가 있을 뿐이다. 필선 그 자체의 몸이 뱀처럼 대지를 훑어나간 자국이라고 할까 혹은 먹의 농담이 짓는 희희낙락한 변화의 상들이 얼핏 스쳐지나간 흔적 같다고 할까. 화면에는 온통 붓들이 흐느적거리며 운율처럼 흘러 다닌 자취뿐이다. 감필법을 통해 텅 빈 화면 위에서의 유희를 최대한 보여주고자 하는 그런 그림, 선과 여백의 조형성으로 충만한 그림으로 다가온다.  
   그러니까 그는 특정한 소재에 국한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적 느낌을 그려나간다. 사의(寫意)나 의취(意趣)가 아닌 풍경 속에 드러난 주관의 강한 표현, 그것은 낭만주의 이래 서구 예술의 이념이다. 한국의 현대동양화란 동양화 정신의 현대적 해석을 통해서 동양화의 현재화를 구사하고자 하였다. 다시말해 작가 개인의 매우 주관적인 심상을 그림 속에 담아내고자 시도하게 되는데, 이런 시도는 작가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배운 기존의 동양화 기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회화적 길을 찾게 된다. 이제 산수에서 벗어나 주변 풍경, 현대적 의미의 ‘풍경’ 즉 사람들의 삶을 둘러싼 하나의 자연환경으로서, 현재의 풍경을 보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상의 풍경이 들어오고 타이어가 쌓인 폐차장도 다가온다. 그러나 그 풍경은 여전히 수묵과 필 맛을 잃지 않는 선에서 조형화 된다. 작가는 간결하게 묘사된 상, 일획 속에서 여러 뜻을 내포하며 전달하고자 한다. 너무 많은 설명은 구차하다는 생각은 비유의 정신을 화면으로 끌어들인다. 함축과 생략이 그렇다. 그는 무엇보다도 필 선의 맛에 매료되어 있다. 무엇인가를 그리려는 마음, 의미, 욕망을 은연중 잠재우고 완전히 마음을 비웠다고 생각될 때 붓을 든다고 하는데 그 타이밍이 그림을 전적으로 좌우한다고 한다. 그 순간으로 점화되기 전에는 먹을 갈면서 숨을 고르고 그 접점에 들어가길 기다린다. 그렇게 해서 한 순간에 그려진 그림이 강호생의 수묵화다.
   그 시간은 번개같이 내려치고 순식간에 끝나버린다. 화면 속 대상은 해체되고 그림을 완성해나가려는 주체의 의지나 목적론적인 그림 그리기는 은연중 소멸되고 남는 것은 잔해 같은 먹, 붓의 스침, 얼룩 등이 격렬하게 흩어져있다. 그 잔해 사이로 그가 건져 올리려는 수묵화, 문인화의 본질 역시 그렇게 존재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