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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컨셉   총글등록수 : ( 2 )
[ 작품컨셉 ]   작품컨셉 KHS 2012-8-01
[ 작품컨셉 ]   평론모음 KHS 2012-8-01
 


작품컨셉
 
강호생의 작업세계
 
생명의 여백 The Margins of Life
강 호 생
 

 The Margins of LIfe 20170201
 fabric+indian ink+acrylic+coating
 100×100cm 
 2017

   태어난 인간의 행위 중 하나는 무언가를 계속 표현하고 싶은 것들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표현의 행위는 그야말로 다양성을 띤다. 이에 대한 범위를 분별없이 나열해 본다면 가시성과 비가시성, 현재와 비현재, 실재와 비실재, 물질과 비물질, 추상과 구상 등의 상반 또는 상보적 관계들이 포함되는 생각들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의 단초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육감 등은 분출 또는 카타르시스에 대한 촉매작용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이 살아 있는 한 나름의 ‘가치’를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개인의 가치로는 먼저 재물, 쾌락, 건강문제들을 떠올리겠고, 사회의 집단적 가치로는 애정, 그리고 문화적 가치로는 학술, 도덕, 미적가치 등을 이야기 하며 마지막 최고의 가치라고들 말하는 종교적 가치를 생각하게 된다. 즉 물질, 오락, 신체, 집단, 순수이성, 실천이성, 미술 등과 종교로의 가치도 이렇게 열거한 것처럼 서열이 있다고들 한다. 이와 같이 사람의 표현 행위들은 이런 소스들이 하나의 모체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나 역시 숨을 쉬고 있는 한 이와 같은 토대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아와의 극명한 경기match로 산출되는 나의 작업은 결국 초자아에 이르러서는 번민이 남을 때가 있다. 나는 이것의 극복으로 작업의 주제를 ‘생명의 여백’이라 이름 하면서 한 작가의 생각에 공감적 위로를 받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현대예술을 바라보는 ‘에프라임 키손’이 떠올려진다. 누구나 겪고 있지만 알면서도 인식 할 줄 모르고, 인식하는가하면 어느새 자기에게 속아 착각의 늪에 빠져가는 것과 결국 숨이 머진 것 초차 인식치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어쩌면 아름다움이 사라진 정신분열증의 현대예술들을 목도하고 있다. 이것은 절대다수의 정상인들을 조용히 숨죽이게 만드는 예술독재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타인의 평론에 속아 그것이 마치 자신을 일깨워 준 것으로 착각하고 그 이름 불러 준 것이 자신의 이름인양 울쭐대는 모습들을 보면 눈꼴시다. 자신도 이해 못하는 말과 그림, 그림 자체가 사이비 철학을 설명하는 삽화가 되어버려 그림의 미적만족을 느낄 수 있는 시대는 정말 갔는가라고 반문하고 싶은 것이다. 위로가 되는 키손의 말처럼 이 시대의 집단적 히스테리와 예술의 혐오감 회복을 위해 내 작업의 붓놀림 하나하나에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가고 싶다.
   나는 언제나 기본적으로 세상의 초등 학문과 원리에 속박되길 원치 않음을 미리 못 박아 둔다. 왜냐하면 이러한 소꿉놀이 같은 것들보다 더 귀중한 거듭남의 자유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내 작품세계와 관련된 최소한의 것들에 무책임할 수 없음으로 나름의 정리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 자체로 이미 직관적 태도를 지니고 있는 수묵화’는 나에게 있어서 내 작품의 근간이 되어왔고 근작들에 대한 방식에 나는 몇 가지의 기본 개념의 배경이 되었던 다음의 내용을 첨가해 본다. 주지하듯 고대 철학자로 형이상학의 수립자인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스승보다 더 완벽한 철학을 만든 하나의 이데아를 말했고, 근대에 들어 데카르트는 자아확인의 자기목적성을 이야기 했다. 가령 그림을 그릴 땐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자기가 있어야함을 인식해야 했던 것처럼 문학에서는 일인이역의 자아확인 소설로 유명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있다. 현대에서는 철학을 철학화한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등 자아 재확인의 합목적성을 예기하면서 결과만이 아닌 과정을 포함한 결과를 이야기 했다. 문학에서는 언어가 숨겨진 백화점이라고 말하는 제임스 죠이스의 율리시즈를 보면 모든 문학의 양상이 다 들어 있어 20C 문호들이 좌절감까지도 느꼈던 작품이다. 이처럼 하나의 것에 다양성의 의미가 있듯이 ‘철학을 철학화’, 모더니즘의 의식으로 받은 ‘미술을 미술화’ 등은 이미 같은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헤겔의 정신의 변증법인 정正thesis, 반反antithesis, 합合synthesis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원리를 기초하여 자신의 상상력으로 풀어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다리오 포’의 수상 소감 연설을 보면 그 자체가 하나의 퍼포먼스를 연상케 한다. 포의 말은 ‘나의 친구들은 올해 광대에게 노벨상을 수여키로 용기를 낸 스웨덴 한림원 관계자들이 노벨상 수상감이다’ 라고 주장했다. 한편의 연극과도 같았던 다리오 포의 강연은 철학을 철학화, 미술이 미술을, 상에게 상을 주는 것 등의 칸트식 어법으로 말했던 것이다. 즉 수상을 결과로 보지 않고 그것도 한편의 과정으로 보는 타목적성이 아닌 합목적성 즉 자기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작도 끝도 없는 즉흥성을 통해 미완성의 과정 절차 자체가 의미를 갖는 일종의 퍼포먼스나 해프닝의 차원으로 전환시켰다는 의미가 ‘다리오 포’에게 살아남고 있다. 이것은 목적 자체가 아닌 시작과 과정, 결과가 다함께 균질적인 의미를 갖는 현대예술 특유의 합목적적인 자기 가치의 정신이 존립하고 있음을 엿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기 가치의 합목적 아래 무책임한 자유를 허락한다면 앞서 말한 ‘에프라임 키손’의 현대예술 비판 측면에서 볼 때 이는 방종일 것이다. 언급했듯이 나는 지금까지 열거한 철학적 사고 및 세상의 초등 학문과 원리에 대해 속박되길 원치 않는다. 책임 없는 자유는 이미 방종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나의 수묵화 작업은 동양미술 특유 중 얼루전allusion의 세계이다. 내 작품의 형성과정을 보면 말 그대로 눈으로 보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고정관념을 버려야 이해될 수 있는 ‘그림이 그림을 그리다’라는 것을 무릎 치며 공감할 것이다. 즉 이 말은 지금까지 언급한 이야기들의 기저와 동일한 원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의 토대로 형성된 내 작품의 기본 컨셉을 수년전에 이미 발표한 내용에서 좀 더 명료히 보충해 본다.
   오래 전부터 수묵화Ink paintings를 탐구해 온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유는 그림이 그려질 재료의 한계성을 연구하는 일로써 재료의 독특한 생리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붓의 종류와 특징, 먹물Indian ink의 장단점, 종이와 천fabric의 한계성을 연구해야 하는 일이었다. 수묵화는 먹물과 물의 양, 붓의 속도, 힘과 유연성, 상하좌우 톤의 균형, 물질간의 시간차 등이 따르는 감각적 테크닉과 직관적 감성을 가져야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영역을 공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세계를 이해하는 단계에 머무를 뿐이다. 깊은 통찰로 들어갈수록 이 세계는 더욱 더 난해하고 고독하다.
   이와 같이 수묵화는 최상의 감각을 요구하는 영역이기에 체험의 즐거움은 무엇이라 표현할 길이 없다. 그 동안 나의 작업은 소재의 대상을 한정하지 않고, 필선 고유의 맛을 드로잉적 요소로 표현한 수묵화 중심의 작업이었지만 수년 전부터 시도한 작업의 흐름은 천 위에 먹물과 색채를 사용하여 물기둥과 흰 종이 흔적의 형상 그리고 점과 실선들의 기호를 보여주고 있다. 이 작업은 온도, 습도, 물과 먹물의 양, 주어진 작품 면적 값에 따른 정확한 물과 물감의 비율들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과의 싸움이다. 이 타이밍의 과정 속에는 우연과 필연이 마치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듯 나타나는데 우연을 필연으로 이끄는 것이 나의 영역이기도 하다.
   동양에서는 오음five-sound은 귀를 멀게 하고, 오색five-colored은 눈을 멀게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색채의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자연스레 색채를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색채의 아름다움과 색채의 위험을 진단하는 감각이 둔해졌다고 할 수 있다. 최소한의 맑은 색채를 사용한 나의 처음 작업들은 엄숙한 수묵화의 모노톤 위에 신선한 환기를 주기 위한 보완의 의미로 적용하였기에 가능한 오색을 절제하여 모노톤의 운치를 표현하였다. 하지만 이후의 작업에서는 최소한으로 시도되었던 담채淡彩에서 색채를 적극적으로 끌어 들였다. 그것도 아예 원색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원색은 긴장감을 주는 물리적 세상의 현실reality이며, 빠른 속도로 빨려 들어가는 블랙홀black hole로 비유한다. 따라서 원색의 적극적 시도는 현실세대의 역동성dynamic을 의미한다. 온갖 비주얼에 감각 없이 길들여졌기에 블랙홀을 탈출할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나의 내면에 언제나 추구하는 것은 ‘영혼의 안식처’이다. 그 안식처haven는 바로 ‘생명life의 여백margin’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블랙홀 현실을 의미하는 색의 역동성과 정신적 개념의 여백 사이를 이어주기 위해서 ‘먹물’을 선택하여 작업한다. 이 모노톤의 먹물은 양자의 중간매체로 ‘스밈sinking’과 ‘번짐spreading’ 그리고 ‘고요함calmness’으로 색의 역동성을 ‘중화neutralization’시킨다. 그리하여 중화작용으로써의 희생sacrifice은 생명life을 탄생시킨다. 색의 현실과 여백의 비현실 사이에서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생명의 여백을 산출하기에 먹물은 곧 안식처의 길목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이 ‘생명’은 ‘색’과 ‘먹물’을 반드시 동시에 포함해야 존재한다. 이것은 양자택일[choose either color색 or India ink먹물]의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 최선의 결론으로만 탄생될 수 있는 것이기에 ‘생명’의 가치는 그 만큼 존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환언하면, 현실적 색의 ‘경험experience’과 통합synthesis의 ‘관념적ideal’ 여백 사이에 ‘합리적rational’ 먹물의 매체를 선택한 나는 먹물을 물리적 현실의 論旨(正)thesis에 反antithesis하는 위치에 배치함으로써 ‘여백의 에너지’를 새로운 ‘생명’으로 統合synthesis시키고자 하는 의도이다. 이것은 셋 모두를 충족시키는 융합convergence의 개념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합일synthesis의 작업을 지속적으로 재 탐구할 것이다.
   나의 마음과 그림에는 언제나 여백을 말하고, 그 여백은 블랙홀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를 제공하며 정신적 유희의 즐거움을 맛보게 한다. 원색이든 모노톤이든 내 작업의 궁극은 여백의 감성sensibility을 추구하기에 마음속의 욕심이 아닌, 버림으로써 자신을 비우는 공간조형을 우선한다. 無nothingness, 素whiteness, 空emptiness은 서로 다를 게 없는 동일한 것으로 無nothingness는 有existence의 근원이 되기에 有는 無에 이르러 마침내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즉 ‘가시적有’인 것은 ‘비가시적無’인 것에 이르러 열매를 맺는다.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르고,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는 이치이기에 내가 유희하는 부분은 여백! 그 '텅 빈 자리'이다. 여백! 그것은 ‘텅 빈 충만’이다. 그것은 채워진 빈자리이다. 그것은 가벼운 중량감이다. 그것은 숨 쉬는 공간이다. 비움으로 채울 수 있기에 나는 그 여백을 사랑한다.

   결론적으로 이 작업은 이후에 원색에서 파스텔 계통으로 시도되고 있지만 색의 역동성과 먹물의 고요함을 통한 여백의 유희이다. 색, 먹물, 여백은 각각 현실, 희생, 감성으로 부른다. 즉, 가시적인 유채색과 무채색과의 이질적 공통분모에서 잉태 된 새로운 비가시적 여백의 감성적 가치를 탄생시키고자 하는 것이기에 이 여백을 나는 ‘생명’이라 이름 한다. 아울러, 광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이 현실의 블랙홀에 떠밀려 내가 추구하는 감성의 아름다움을 탈취 당할 수는 없다. 본성을 산출하는 모체는 비가시적 감성이기에 가시적 현실만 좇는다면 이것은 분명코 주객이 전도 된 삶이며, 주객이 전도 된 작업이기에 나는 이것을 거부한다. 따라서 나의 작업은 섭리 안에 포함된 먹물의 우연성과 필연성을 존중한다. 이것은 ‘그림이 그림을 그리다’라는 엄연한 실재를 내 작업의 향방에 포함하면서 나를 속이지 않는 올곧은 마음으로 생명의 길을 묵묵히 걷고 싶다.  이와 관련된 내 작업의 컨셉을 하나의 도표로 정리하고자 한다.


 


   
  
 

선율-생명의 소리 / 旋律-生命的 聲音 / melody-the sound of life 



강 호 생
   

  인식에 대한 깊이와 넓이와 높이, 즉 입체적 사고가 결여된 상태에서의 일들은 본질을 깨닫기에 역부족이다. 평평한 그림자만 가지고 원형을 바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의식을 가지고 붓을 드는 화가들은 대부분 이 본질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을 던져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시작도 끝도 없는 세계를 배회하며 희박한 답을 찾아내려고 끊임없는 자신과의 투쟁을 버릴 것이다. 만족하는가?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 가치가 있는 것인가? 자작(自作)의 희소성에 오만한 것인가? 연실 터져 나오는 질문들은 작가의 슈퍼에고마저도 멍들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로 살면서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 인식의 입체적 사고를 중시하는 작가는 그리 흔치 않다.

  melody-the sound of life 20180404
  122×122×5.5cm
  Acrylic color on the Fabric
  2018

  '
선율-생명의 소리'라는 주제로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는 상기와 같은 질문들로 충만하다. 현상으로 나타난, 그리고 그것을 통한 인식이 본질이라면 이것은 쉼 없이 움직이는 것이기에 고정화된 인식은 본질 성찰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물음에 그림을 왜 그려야 하는가? 라는 것은 자기 성찰로도 연결이 된다. 무엇을 그리느냐? 어떻게 그리느냐? 왜 그려야 하냐?... '기표''기의'를 포함한 것이 '기호'라고 설명한 퍼스의 삼부 모형을 보면 이것을 기호학으로 얘기한다. 기표없는 기의만 가지고 기호가 될 수 없듯이 기의 없고 기표만 가지고도 기호가 될 수 없다. 이는 '무엇what''방법how'을 포함하면 'why'라는 것과도 닮아 있다. '''본질'이라면 '무엇' 없는 '방법'은 왜가 성립이 안되며, 방법 없는 무엇 또한 왜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무엇과 방법 그리고 기표와 기의 결합은 의미작용으로써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 태도는 부유하는 배의 등대가 될 수도 있다.

  작가는 여기서 더 특이한 생각을 내놓는다. [무엇과 방법의 합이 ''일 때에 '방법'의 산출은 왜에서 무엇을 제거하는 것이고, '무엇'의 산출은 왜에서 방법을 제거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에서 무엇, 방법에서 방법, 왜에서 왜를 제거하면 모두 제로가 된다. 이와 같이 기호는 기표와 기의에 대한 합으로 산출되어 '기의'의 값은 기호에서 기표를, '기표'는 기호에서 기의를 제거한 값으로 도달한다. 여기에서 기호가 본질로 본다면, 본질은 기표와 기의라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이러한 현상의 값을 통하여 본질이 인식된다는 것인데, 동시에 본질에 대한 인식은 그 자체로 발전하는 것이기에 고정된 인식으로서는 본질에 다가가기 불가능한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작가는 자신의 내면에서 발전되어 움직이고 있는 현상들에 충실하다. 경우의 수를 탐구하는 것, 그것은 작가의 작품제작에 대한 근간이 되어왔다.
  이번 발표작들의 '선율-생명의 소리' 시리즈는 작품 제작의 '방법'을 변형시키고 있다. 물론 작가가 변함없이 기저로 두고 있는 것은 묵과 여백미라고 할 수 있다. 고요함으로 모든 것을 중화시키며 희생물로 대체된 먹과 그리고 숨 쉬는 생명의 공간으로 설정된 여백미의 산출 값은 더하는 것이 아닌 빼내어 비워둠으로써 완성에 접근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비워둠이란 애초부터 없던 것이 아닌, 있었던 또는 있어야 된다고 주입하는 현상들에 대한 절제이다. 있음(,)은 없음(,)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되는 여백미의 진수를 맛보았기에 작가의 이러한 개념 태도는 자신의 굳건한 반석이 되는 셈이다.
  가야금 보다는 거문고 소리가 좋다고 하는 작가, 트럼펫보다는 호른 소리가, 바이올린 보다는 첼로 소리가 좋다고 하는 작가다. 그 좋아하는 소리는 마침내 '묵의 장중한 맛과도 같다'라고 한다. 활처럼 팽팽해진 줄에 먹물을 바르고 백색의 화면 위에 먹줄을 튕긴다. 무거운 울림과 파동은 오묘한 현상들의 선율로 나타난다. 파동의 먹물은 금방이라도 들릴 듯한 생명의 소리로 다가온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수직과 수평의 교차된 먹줄들은 마치 몬드리안이나 프랭크스텔라의 차가운 추상을 연상시키지만 직관적 수묵화의 필법과 용묵에 착안된 이른바 뜨거운 추상의 앵포르멜 선풍을 몰아온 죠지마튜의 운필로부터 피에르술라쥬, 프란츠클라인, 샘프란시스, 모리스루이스, 헬렌프랑켄탈러, 파묵조 기법의 윌렘드쿠닝, 초서체의 마크토비, 굵은 묵필의 로버트마더웰 등에서 나타난 것들은 작가의 뜨거움과 일치한다. 외관의 색채는 유화 같은가하면 이면에 더 짙게 풍기는 것은 동양적 신비감이 뜨거운 마음을 갖게 한다. 이 두 개를 오묘히 합친 것은 헤겔의 정반합에 대한 원리와 다르지 않다. 모래위의 집이 아닌 반석위에 집을 짓는 것은 바른 정신이 바른 결과물을 낳는 것과 같이 '마음의 전달이 소홀하면 기교는 눈에 띄게 드러나는 법' 이라고 작가는 또 다시 강조한다.
  그러므로 '왜 그림을 그려야 하는가?'에 대한 작가의 일관된 세계관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가치사랑'이라는 것이며 작가의 함축된 이러한 언어 속에서도 본질의 여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림은 그리지 않는 것이 그림이다!' 라고...

 

 

생명력-수묵에 대한 빛과 시간의 역사
강 호 생
  
  언제부터인가 그림들이 획일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무척 다양한 가운데서 오히려 가장 단순적 획일화를 발견할 수 있는 지금의 미술풍토는 어찌된 것인가? 역설과 반어가 반복적으로 섞여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다양성이라는 외침이 왜 더욱 초라할 정도로 단순성으로 침몰하고 있는 것일까? 

 light and History of
 Time 2011019
 fabric+indian ink
 150×40×3cm
 2010
   작금의 세계적 미술풍토는 자존이 퇴색한 유행성 출혈병에 걸려있다. 네가 아닌 내가 앞서야하는 무지의 반복적 결과는 독보적 스타성의 욕망으로 약삭빠르게 유행을 타며 나오지 못할 거대한 블랙홀에 삼킴을 당하고 있다. 혹 이 모습은 내 모습이 아닐까? 아니면 지구에 사는 우리 화가들의 모습일까?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이 무엇이며, 앎이 또한 무엇인가? 노마드가 지속성을 띠었을 때는 공허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사람은 얼른 공허에서 탈출하려는 의식이 따른다. 동물은 그 자체가 타협에 본질적으로 능하다. 동물적 속성을 지닌 사람도 이에 벗어날 수는 없으며, 자존조차도 의식치 못한 채 타협에 재빠르게 된다. 모든 이러한 결과는 착각적 다양추구의 산물이 획일적 단순을 생산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존재 재확인이라는 것에 대한 탐구심이 따른다. 거슬러 올라가 보자. 역사성, 다양성, 스타성, 예술성, 철학성 등등은 사실 지금까지 이미 세대 전부터 반복되고 있다. 특별히 더 낳아졌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때마다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는 약정모순이 지속되고 있고, 그 가운데에 시간이 개입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이 지속성의 시간과 공존하기에 나는 때론 무책임의 자유를 따르기도 하는 방종을 즐기기도 한다. 나에게 있어서 방종의 자유가 없다면 나는 붓을 들 이유에서 제외된다. 방종속의 유희는 거듭되는 나를 산출하게 한다.
  나를 산출하는 모체는 수묵이다. 나는 지금부터 나의 모체를 말한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단순히 그리는 것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림이 그려질 재료의 한계성을 연구하는 일이다. 재료의 특수성을 모르면 자신이 표현하고 싶음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갖은 종이의 생리를 알아야 하고, 붓의 종류와 특징, 먹의 장단점, 심지어 벼루의 재질도 중요하다. 동일한 먹으로 어떤 벼루를 선택하는가에 따라서도 색감, 무게, 온도 등이 다르다. 특히 필선의 엄청난 변화의 제약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 모두는 먹과 물의 양, 필선의 속도, 힘과 유연성, 상하좌우의 톤의 균형, 물질간의 시간차 등 초 감각적 테크닉과 직관적 감성을 동반치 않고서는 범접치 못하는 영역이다. 물론 이런 영역을 공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런 세계를 이해만 하는 단계에 머무른다. 여기서 나는 절대고독이라는 것과 만난다.

  이번의 작품 형식은 내가 1982년부터 시도했던 것들의 결과이다. 시간의 역사, 흐름, 물방울의 이동과정, 시간의 흐름,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물방울의 형상과 흔적들, 각 각의 물방울 형상과 그 밖의 형상은 이야기 하듯 살아 있다. 서양화 캔버스가 아닌(표면에서 바로 발색하는 것이 아닌) 동양화 특유의 맛(즉 흡수해서 다시 토해내는 발색-상당히 깊이가 있고, 무겁고, 오묘한 먹의 발색효과)을, 어찌 보면 맑고, 선명하고, 투명한 물방울을 번지고, 선명치 못한 수묵을 통하여 엄청난 모호함과 아우라를 뿜어내는 효과를 만든다. 여기서 나는 우연성을 필연성으로 재수정하고, 우연과 필연의 뗄 수 없는 상보관계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한다. 이렇듯 인체의 배경과 합치된 물방울과 또 다른 이미지들은 빛과 시간을 간직한 '생명력'을 표현하고 있다. 
  
 
 
 

"마음속에 욕심이 아닌, 이기가 아닌, 버림으로써 자신을 비우는 공간조형

강 호 생

음률... 
  내 그림 속에는 언제나 여백과 어우러지는 묵의 범람이 충만하다. 그 속에는 번지고, 스미는 가운데 강한 갈필과 윤필이 공존한다. 또한 나는 ‘선과 여백의 조형성’에 의미를 두면서 지적 정신을 기초로 하며 감필법을 통한 텅빈 화면 위에서의 유희를 최대한 표현한다. 작품의 상.하.좌.우의 톤을 배려하면서도 그림의 숨구멍을 위하여 한산한 여백을 드러내기도 한다. 농묵과 담묵들 사이에 역동하는 생명의 소리를 표출하며, 어떤 작품은 악보의 형상이 드리워져 있는데, 흑과 백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합창의 소리를 표현한 것이다.
  흑과 백의 역동은 공간구성의 요소로서 여백의 존재부분과 표현이 가해진 부분은 서로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 둘은 끊임없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空, 虛, 白! 이 모두는 다를 게 없다. 空, 虛, 白이 있어야 비로소 實이 제 맛을 잃지 않는 것이다. 가령 虛는 實을 포함하면서 보다 더 깊고 진실한 것을 의미하며, 實은 虛에 이르러 마침내 완성된다. 내 작품은 잡다한 생각에 머무르지 않는 즉, 직관적 일 필에 내 혼을 쏟아낸다.
 
음률!
  이것은 묵향과 나의 마음에서 읊어대는 유희이다. 내가 유희하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텅빈자리'이다.
  여백! 그것은 텅빈 충만이다.
  그것은 채워진 빈자리이다.
  그것은 가벼운 중량감이다.
  그것은 숨쉬는 공간이다.
  비움으로 채울 수 있기에 나는 그 여백을 사랑한다.